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원정 (문단 편집) == 전쟁 배경 == [[독일.폴란드 원정]]에서 나폴레옹에게 깨진 러시아는 1807년 [[틸지트 조약]]으로 명목상으론 프랑스의 대등한 동맹국이었다. 나폴레옹은 어느 정도 자유주의 성향이 있었던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과 대적하는 프랑스의 입장에서 대륙 지배의 파트너로 러시아를 구상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명목상 대등한 동맹국 대우를 해주었다. 나폴레옹은 1809년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다시 굴복시키면서 당분간 유럽 대륙 내에는 나폴레옹에 맞설 나라가 없었다. [[영국]]은 본토가 침공받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고,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다른 나라들은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나폴레옹와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죽이 매우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은 1809년 러시아의 핀란드 병합을 묵인했고, 나폴레옹과 차르의 여동생인 안나 황녀의 결혼 얘기가 오가는 등 두 나라 사이는 화기애애해 보였다. 하지만 1810년 러시아와의 혼담은 무산되었고,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를 선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1808년 10월 [[에어푸르트]] 회담부터 두 나라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오스만 제국]] 공격을 저지시켰고, 바르샤바 공국 수립으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며 차르를 화나게 했다. 폴란드 문제와 오스만 문제는 러시아와의 공조가 필요한 민감한 사안이었으나 나폴레옹은 이 문제에 있어서 러시아를 무시했다. 거기에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의 지배 및 영국에 맞서는 [[대륙 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서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 전역과 독일 북해안 및 엘베강 하구까지 발트해의 거의 모든 항구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한자동맹]] 도시와 올덴부르크 공국을 합병한 것이 러시아를 크게 자극했다. 당시 올덴부르크 공국은 차르의 넷째 여동생이었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의 남편 페터 프리드리히 게오르크가 법정 상속인인 나라였으며, 차르의 모후인 마리야 페도로브나의 외가인 뷔르템베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칼 14세 요한|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태자가 된 것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스의 군사정책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차르의 곁에는 황태후를 비롯하여 수많은 반 보나파르트 세력이 존재했고 이들은 차르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다. 한편 해군력의 미비 때문에 영국 본토를 침공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말려 죽이겠다는 생각에서 몇 년 전 [[대륙 봉쇄령]]을 내렸었다. 오스트리아가 쳐발린 지 한두 해만에 대군을 회복한 것도 영국이 은밀히 지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바와 같이, 유럽 지배를 확고히 하려면 영국을 경제적으로 굴복시키지 않고선 장기적으론 불가능하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여기에 미온적으로나마 참여했지만 교역 감소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당초 예상치를 초과했다. 러시아의 주요 수출 품목인 곡물, 삼, 목재, 수지, 송진, 칼륨, 가죽, 철의 대영국 수출이 완전히 붕괴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정작 러시아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한다거나 남아도는 러시아 물건을 사준다거나 또는 러시아가 필요한 물품을 수출해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기에 러시아의 반발이 커졌다. 생필품은 이탈리아나 독일에 파는 것이 이득이었고, 따라서 러시아엔 향수, 독주, 도자기, 보석 같은 사치품만 팔렸다. 이에 격노한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12월 프랑스산 사치품에 높은 관세를 적용하고, 중립국 선박에게 항구를 개방하며 나폴레옹에 대한 항의를 표시했다. 가장 심했을 때 영국이 한 번에 상선 600척을 발트해 쪽으로 보내서 러시아와 무역을 하곤 했다. 반면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의 실질 임금이 3분의 1로 감소했고, 미국이 프랑스에 붙어서 대미 수출이 10분의 1로 감소한 데다가, 네드 러드 같은 기계 파괴 노동자 폭동 때문에 영국에선 전시도 아닌데 수도 런던에 병력 50,000명을 배치해야 했다.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의 웰링턴의 병력과 맞먹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잘 싸우고 있었던 웰링턴으로부터 4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급히 차출해서 국내에 배치해야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해안 항구 도시들의 피해가 더 막심했다.]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밀어붙인 대륙 봉쇄령이 실효를 발휘하려면 반드시 러시아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거기에 폴란드 문제로 1811년 양국은 충돌하여 전쟁 위기까지 갔으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스웨덴이 러시아를 지지하길 거부하자 차르는 일단 물러서서 나폴레옹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이 닥칠 것이라 경고했고,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 봉쇄령이 러시아에 너무나 부당하다며 어려움을 설명하고 봉쇄령의 폐지와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 직전 러시아 수출량의 30%가 영국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전쟁할 준비에 돌입하여, 러시아 최신 지도를 입수하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1811년 8월 15일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 일부를 할양해달라고 요구하자 튈르리 궁전에서 러시아 대사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쿠라킨 공작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내가 80만 군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동맹국에 기댈 생각인가 본데 동맹국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고, 러시아는 반발하며 쿠라킨 공작을 소환하는 것으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전쟁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러시아 원정에 대해서는 프랑스 내부에서도 외무상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탈레랑]], 주러 프랑스 대사 아르망 드 콜랭쿠르가 나서서 모두 만류했다. 콜랭쿠르는 나폴레옹에게 전쟁은 중대한 실수이고 이베리아 원정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나폴레옹은 무시하며 콜랭쿠르를 소환하는 것으로 응대했다. 콜랭쿠르는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차르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무려 다섯 시간 동안 보고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전쟁을 결심한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